
스위스 현지 시각 4월 8일 오후 12시 20분.
A씨는 조력사망 기관인 디그니타스의 블루하우스에서 삶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시민이자, 루게릭 환자였던 그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또렷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인터뷰한 의사는 연민이 담긴 눈으로 말했다. "당신은 조력사망을 위한 충분한 요건을 갖췄습니다."
나는 그와 가족들의 요청으로 동행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정이었다.
그 여정을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눈물 흘리는 것뿐이었다.
출국 전 만난 지인은 내게 물었다.
캐나다도 네덜란드도 조력사망 제도가 있는데 왜 꼭 스위스까지 가야 하느냐고. 이유는 단순하다.
스위스만이 외국인의 조력사망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현재 안락사나 조력사망을 허용하는 국가는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미국의 일부 주 등 10여 개국이다.
독일은 법적 허용은 했으나 제도가 구축되진 않았다. 프랑스는 하원을 통과한 입법안이 심사 과정에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존엄사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며 해당 입법안을 적극 추진해 왔다.
영국은 하원에서 조력사망 법안이 통과되며 법제화 직전까지 갔지만, 지난달 최종 관문인 상원에서 멈춰 섰다.
그사이 43명의 영국인이 스위스의 디그니타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안락사와 조력사망을 둘러싼 논쟁이 첨예한 가운데, 이를 제도화하는 나라는 늘고 있다.
최근에는 중남미 최초로 우루과이가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국가마다 기준과 자격은 다르지만 모두 자국민에게만 허용하고 있다.
스위스는 지구상에서 외국인의 조력사망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다.
하지만 자국민은 자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이 디그니타스, 라이프 서클 등 스위스 조력사망 기관의
신념이다. 나는 그 신념이 옳다고 생각한다.
A씨는 산소호흡기를 단 채 기내에서 13시간을 견뎠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 떠나는 것이 좋을지,
비행기에 탈 수 있을지, 가는 도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쩔지 마음 졸이던 나날들.
내 집을 떠나 낯선 타국에서 죽음을 맞는 아이러니.
이 모든 부가적인 고난은 한국에 제도가 있다면 겪지 않아도 된다.
조력사망을 허용하고 있는 나라들이 하루아침에 제도화를 이룬 것은 아니다.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 그 시작은 1970년대, 말기 환자의 고통 앞에서 내린
의사들의 용기 있는 '침묵의 결단'들이었다. 1980년대 대법원은 의료 현장의 관행을 인정했고,
2002년에 이르러 법제화가 완성됐다. 30년에 걸친 사회적 논의와 합의의 결과였다.
그리고 시행 20년이 지난 지금, 네덜란드는 새로운 단계의 논쟁 국면에 들어서 있다.
'우리에게 안락사가 온다'의 저자 마르틴 부이선은 자국의 상황을 '특권적 연민'과 '완결된 삶'이라는
두 개념으로 풀어낸다.
의학적으로 명확한 고통을 가진 환자에게만 연민에 기반한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과,
삶의 자율성에 기반한 완결된 삶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 맞서고 있다.

우리는 그 질문 앞에 서지도 못했다.
2024년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었으나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회복 불가능한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들에 대한 선택지조차 없다.
그래서 우리는, 원하는 죽음을 맞기 위해 스위스로 간다. 디그니타스가 설립된 1998년부터 현재까지
12명의 한국인이 그곳에서 조력사망을 시행했다. 엄마는 8번째 한국인이었다.
나는 블루하우스에 두 번 방문했다. 한 번은 나의 엄마와, 다른 한 번은 타인의 엄마와.
출국 당일, A씨와 가족들은 비행기에 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위기를 몇 번씩이나 겪었다고, 스위스에
무사히 온 걸 기적이라고 했다. 우리 역시 기적이었다.
엄마의 급격한 상태 악화로 갑자기 앞당겨야 했던 출발일과 예정일, 단 세 자리 남아있던 비행기 좌석,
급작스레 결정된 취재진과의 동행. 그리고 끝내 맞이한 평온한 죽음.
나는 그것을 차라리 운명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역경과 시련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선의를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여전히 가슴에 남는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기적에 기대야 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선택이 가능한 사회인가.
남유하 작가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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