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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그 '빤스'는 생을 다했다

by maverick8000 2026. 6. 4.

 

 

빨래를 했다. 3주 만에 했다. 더는 입을 팬티가 없어서 했다.

더는 쓸 거리가 없어서 드디어 내밀한 속옷 이야기까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다며

역정을 내는 독자도 계실 것이다. 밑천 떨어지면 빤스, 아니 팬티라도 벗어야 하는 법이다.

 

빨래를 하다 아우성을 들었다. 팬티들 아우성이다.

어떤 팬티는 허리 밴드가 늘어날 대로 늘어났다.

어떤 팬티는 허벅지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능력을 잃었다. 어떤 팬티는 색만 봐도 이미 황천행이다.

선물 받은 명품 팬티는 철자를 잃었다. 발렌시아가가 아니라 바엔이아가가 됐다.

 

 

남자들은 좀처럼 팬티를 버리질 못한다. 밴드 힘이 다 풀려 팬티의 자긍심을 잃을 때까지 입는다.

헬스장 탈의실에서 저절로 발목까지 내려가 우리 자긍심을 잃을 때까지 입는다.

새 팬티를 사고도 헌 팬티를 잘 못 버린다. 남들 보여주려 입는 옷이 아니라 그런 모양이다.

 

요즘 러닝을 시작했다. 거짓말이다. 걷기를 시작했다.

원래는 러닝을 할 생각이었다. 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냥 걷기로 했다.

매일 경의선 숲길 공원을 끝까지 걷는다. 걷다가 두통이 왔다. 우리 집안은 뇌졸중 내력이 있다.

나이가 들면 깨닫는 것이 있다. 유전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피할 수가 없다.

 

덜컥 겁이 났다. 병원으로 실려 가면 옷이 다 벗겨질 것이다.

간호사들은 내 속옷을 보고 혀를 찰 것이다. “7번 응급 환자 상태는 어때?”

“아이고, 생을 다했습니다. 팬티가 생을 다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다만, 이왕 벗겨질 거라면 예쁘게 벗겨지고 싶다.

 

낡은 팬티는 다 버리기로 했다. 빨래도 부지런하게 할 생각이다.

입을 팬티가 떨어져 어제 입은 팬티를 뒤집어 다시 입는 짓까지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자긍심은 겉이 아니라 단단하게 감싼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선거철만 되면 열심히 빤스, 아니 팬티 벗는 정치인들을 보며 깨닫는 교훈이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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