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달콤씁쓸한 맛

by maverick8000 2026. 6. 9.

 

 

 

한창 바쁘게 살던 어느 날 거울 속의 내 눈자위가 노랗게 보였다.

백옥 같던 피부도, 손바닥, 발바닥도 색 바랜 개나리가 되어있었다.

차일피일 검진을 미루다 근무 중 심한 복통으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의사는 나의 간 염증 수치가 너무 높아 당장 수술 불가하니 입원해서 정상이 되면

담낭을 제거하자고 했다. 수술 후 이틀이면 퇴원 가능하다는데 나의 의사는 일주일이나 나를 붙들었다.

덕분에 위궤양 같은 잔병 치료까지 받을 수 있어서 회진 시간이면 나는 자동으로 홀라당 배를

먼저 노출하는 성의를 보였다.

퇴원할 즈음 그는 제거한 나의 장기를 모니터로 보여주었는데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나의 쓸개가 마치 득도한 고승처럼 백옥 사리를 가득 품고 있었다.

살아서 사리가 생겼다는 묘한 자부심에 기념으로 몇 알을 얻고 싶었지만, 엽기적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의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술을 끊으라는 등 내게 이런저런 주문을 했는데 나는 그날로 의사를 끊기로 했다.

 

 

직장에 복귀한 며칠 후 평소 농담을 주고받던 동료가 책상 위로 문제지를 돌렸다. 

다음 중 쓸개가 있는 동물을 고르라는 항목에 말·사슴·호랑이 그리고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을 기운도 없어 먼저 ‘쓸개 없는 동물’을 검색했다. 

초식동물은 대부분 쓸개가 없었다. 특히 아름다운 동물인 말이 쓸개가 없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런데 옛 고문에 이런 문장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말은 쓸개가 없어 헛것을 보면 마구 튀어 달아나며 겁이 많고 심지어 자신이 뀐 방귀 소리에도 

놀라고, 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놀라고, 자기 뒤에서 자기 꼬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도 놀라는 것이다.

 말이 전쟁터에서 창과 칼을 겁내지 않고 돌진하는 것도 쓸개가 없기 때문이고, 헛것에도 놀랄 만큼 

겁이 많은 것도 쓸개가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쓸개는 용기와 결단력의 근원이었다.

담력이 있다거나 대담하다는 말은 모두 쓸개 담(膽)을 어원으로 한다. 나는 글을 읽고 의기소침해졌다.

이제 나는 소리와 그림자에 놀라면서 무모하게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다 꽁무니를 빼는 겁쟁이가

될 것 같았다. 평소 엄마가 호통을 칠 때 관용어구로 사용하는 “쓸개 빠진 인간”에 합류한 것도 우울했다.

그러나 여장부 소리를 듣던 내가 연약한 여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쓸개는 간에서 만들어진 담즙을 보관하는 단순 창고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성격 변화와 관계없다는 말도

안도감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쁜 일상에 묻혀 내가 수술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쓸개가 없다는 말은 인격과 결부되는 이중의 의미가 있어 누가 묻기 전에 먼저 말하지 않았다.

 

최근 나의 지인들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이가 드니 자기 병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는데 나는 내 주변에 “쓸개 빠진 인간”이 많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나는 그들과의 차별화 전략으로 내겐 유난히 ‘영롱한’ 사리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일부 의학계에서 스님들의 사리를 장기간의 좌선 수행으로 인한 결석으로 추정한다는 의견도 곁들였다. 

다소 황당한 나의 주장에 자기 담석도 ‘사리’였다고 우기는 부류가 생겼다. 

사리가 생길 만큼 네가 무슨 인고의 세월을 살았느냐고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갑자기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며 근심 걱정으로 하 세월을 보냈는지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날 즉석에서 “쓸개 빠진 인간” 모임이 결성되었다.



사노라면 모든 것에 조심스러워진다. 

우리가 겁이 많아진 건 쓸개가 없는 탓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겐 재산이나 명예, 가족일 테고 어떤 이에겐 체제나 신념이며 또 그 모두이기도 할 것이다. 

각기 생각은 달라도 우리는 쓸개가 없으니,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지는 않을 거라고 

마주 보며 웃었다.



월나라의 왕 구천은 평생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쓰디쓴 쓸개를 핥았다는 상담(嘗膽)을 남겼고 

입맛이 소태같다는 말은 쓴맛을 뜻한다. 

살다 보면 가끔 쓸개 맛을 볼 때가 있다. 인생이 늘 달콤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는 단맛과 쓴맛이 공존하는 ‘Bittersweet(달콤씁쓸)’이다.

* bittersweet

1.고통이 섞인 쾌감. 2.달콤 쌉쌀한. 3.붉은 기가 감도는 오렌지색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출처: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