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때가 있을까. 학창 시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처음 접했을 때 별다른 감흥이
오지 않는 데 놀랐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도 없는 지루한 소설이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가난하고 나이 든 어부가 바다에 나가 85일째 되던 날 거대한 청새치를 만나
혈투를 벌인 끝에 항구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하지만, 상어 떼의 공격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는 이야기다.
재미없던 '노인과 바다'가 어느 날 내 인생 속으로 들어왔다. 좋아하는 커피가 계기였다.
헤밍웨이의 다른 소설이 와인과 술의 향연이라면 이 작품에서는 맥주가 살짝 등장할 뿐 커피가
전환점 역할을 한다. 소설 속에서 커피 마시는 장면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커피는 노인이 출항하기 직전, 잔심부름하는 소년 마놀린이 가져온 것이다.
어부들을 위해 아침 일찍 문 여는 음식점에서 연유통에 따라놓은 커피였다.
"노인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온종일 아무것도 마시지 못할 것이므로 커피라도 꼭 마셔두어야 했다."
두 번째 커피는 거대한 청새치와 일생일대의 싸움 끝에 결과적으로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와 탈진한 나머지
깊이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소년이 노인에게 내놓은 것. 소년은 식은 커피를 데워서 노인 어부에게 권한다.
그때 노인은 말한다. "마놀린, 내가 그놈들에게 완전히 졌어." 첫 번째 커피가 도전의 커피라면, 두 번째 커피는
쓰라린 좌절과 고난을 위로하는 커피였다.
바다는 인생의 목표가 있는 곳, 항해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다. 일생일대의 대어를 놓쳤다고
실의에 빠져 있던 노인에게 소년이 건넨 따뜻한 커피는 두 사람의 마음을 잇는 소통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헤밍웨이의 글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한 인간의 도전과 용감함, 좌절과 나약함,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묘사한다.
소설의 백미는 다음 구절이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
대어를 찾아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거대한 청새치를 발견하고 잡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상어 떼의
공격에 직면한 자의 목소리다. 비록 손에 쥔 것은 없고 몸도 망가졌지만, 결코 정신적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다.
그렇다. 리더라면 누구나 대어를 바란다.
대박, 빅히트, 대형 프로젝트, 대형 합병, 대형 수주, 베스트셀러…. 이름은 달라도 비슷한 의미다.
세상에는 청새치라는 거대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낚았다고 기뻐하는 순간, 순식간에 채어 가려는
상어 떼들도 득실거린다. 성공했다고 축배를 들기 직전 실패의 쓴잔을 들이켜야 하는 분하고 괴로운 순간이다.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 연속된 비행기 추락사고로 두개골이 금 가고 내장이 파열되는 끔찍한
고통을 겪고도 살아남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삶을 끝냈다.
고전이 뭔가? 살아남은 책이다.
시간의 잔인한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만큼은 살아남아서 험난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작품 주인공들은 불굴의 정신으로 도전했다가 실패나 좌절을 하지만, 가혹한 현실에
징징거리지 않고 핑계를 대지도 않으며 결과를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비틀거리면서도 옷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난다. 아무리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불운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투덜거리지 않는다.
그의 소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말하는 '품격의 메시지(Message of Dignity)', 즉 삶의 의연함이다.
'노인과 바다'가 내 인생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대표이사 직위에서 물러난 직후 힘겨워하던 어느 날이었다. 헤밍웨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멘토였다.
그의 작품 주인공들처럼 다시 일어나 쿨하게 앞으로 걷도록 만들어 주었으니까.
오늘은 작품 배경인 쿠바가 낳은 전설적인 음악가 콤파이 세군도의 경쾌한 노래를 틀어놓고
커피 한잔 마시면서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어야겠다.
[손관승 리더십과 자기계발 전문 작가 ceonoma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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