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인간을 가장 깊게 침식한 질병은 의미의 빈곤이다.
무엇을 해도 즐거움이 없고 어떻게 해도 재미를 느끼지 못해 방황하는 공허가 우리를 괴롭힌다.
마음을 좀먹는 우울증, 하고 싶은 게 없어 숨만 쉬는 무기력, 신종 전염병인 번아웃 등이 그렇다.
'주변의 상실'(글항아리 펴냄)에서 샹바오 독일 막스플랑크 사회인류학연구소 소장은
뿌리 뽑힌 삶의 원인이 부근의 상실에 있다고 주장한다.
부근은 우리가 흔히 집 부근, 회사 부근, 동네 부근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장소들, 그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거기에 속한 단체나 모임, 동식물 같은 자연환경을 포함한다.
마을이나 지역사회 정도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부근을 잃으면 삶의 실감이 떨어져 초월감만 남는다. 붕 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존감을 상실하고 무의미에 시달리며 인간관계도 약해져,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유령의 존재가 된다. 의지할 데 없는 마음을 쉽게 유혹하는 것이 신흥 종교, 극우 단체, 테러 조직 등이다.
샹바오는 부근의 상실을 극복하는 삶의 태도로 '방법으로서의 자기'를 제시한다.
'자기'를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자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자기는 개인이나 자아가 아니다. 나와 타자의 관계를 통해 매번 새로워지는 네트워크를
뜻한다. 쓸데없는 나라 걱정, 세상 걱정 대신 자기 경험에서 출발하고 마을에서 시작해 삶의 구체적
실감을 회복해 가자는 말이다.
샹바오는 새로운 인간의 원형을 중국 전통 지식인인 향신(鄕紳)에서 찾는다.
주로 낙향 관료나 과거 합격자로 이뤄진 향신은 자기가 속한 세계를 속속 파악하고 있다.
그는 그 세계의 문제를 보통사람의 언어로 체계화하고, 그 비판적 해결 방안을 모색할 줄 안다.
향신은 자기 동네, 자기 지역 전문가다.
허풍쟁이들이 국가적·지구적 문제로 입을 턴다면, 향신은 마을 우물물 보호 같은 지금 이곳의 일을
해결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간다. 그는 거대 담론이나 보편 가치를 내세워 사태를 재단하거나,
도덕적 우월감으로 타인을 얕잡지 않는다. 향신은 작은 세계로부터 세상을 바라보고,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아가며, 개인 경험에서 출발해 큰 문제를 논한다.
샹바오는 지식의 임무가 세상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정확하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 돌아가는 형세, 미래의 모습을 명료하게 파악하고, 공감 어린 말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현실과 유리되어 허황하게 살아가기보다 향신처럼 분수와 한계 안에서
나날이 자기를 고쳐나갈 때 부근의 상실을 이겨내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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