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바 ‘고래선(船)’을 타는 비용은 이틀에 약 50만원이었다.
매년 1~3월, 일본 오키나와 바다에는 혹등고래가 찾아온다. 출산과 양육을 위해 고위도의 차가운
바다에서 먼 길을 떠나온 개체들이다. 갓 태어난 새끼는 지방층이 얇아 체온 유지가 어렵기에,
어미는 따뜻한 이곳에서 새끼를 낳고 기른다.
이 기간에 다른 목적 없이 오직 고래만을 찾아 떠나는 배를 고래선이라고 부른다.
최근 이 ‘혹등고래 원정’에 합류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뱃삯에 항공권 값, 숙박비를
더하니 150만원이 넘었다. 통장 잔고를 애써 외면하며 비행기에 오른 이유는 단 하나.
14~15m에 달하는 혹등고래의 압도적인 몸체를 눈에 담는 것이었다.
첫날, 배 위에서 8시간 동안 새파란 수면만 응시하다 항구로 돌아왔다.
하루 치 뱃삯 25만원이 바닷속에 녹아버린 기분이었다. ‘고래 없는 고래 원정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이튿날, 드디어 수면 위로 육중하게 떠오르는 나비 모양의 꼬리를 발견했다.
입수 준비를 서두르는데 일본인 선장이 나지막이 제지했다.
“곁을 내어 줄 고래가 아닌 것 같다.” 경계심이 높으니 다가가지 말고 보내주자는 의미였다.
비슷한 상황이 2~3차례 반복됐다. 원정은 결국 멀찍이서 고래 꼬리만 구경하다 끝이 났다.


울적한 심정으로 야키니쿠 가게에 앉아 고기를 굽고 있노라니 머릿속 계산기가 팽팽 돌아갔다.
뱃삯으로 지불한 엔화 다발이면 이 집 고기를 몇 판이나 더 먹을 수 있었을까.
고래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떠난 여정이었거늘, 아쉬움이 크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며칠 뒤, 퇴근길에 택시가 잡히지 않아 웃돈을 얹어 앱으로 택시를 호출하려다 멈칫했다.
야생의 고래를 마주하는 일이란 애당초 도시에서 택시 부르듯 돈 주고 해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난 어느새 지불한 비용만큼 결과를 취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내심 고래를 보기에 충분한 값을 치렀다고, 그래서 당연히 고래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배가 고플 때 배달비를 더 내고 음식을 빠르게 받아 보려던 일상에서처럼 말이다.
돈으로 시간을 사고, 기다림을 생략하는 시대.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반갑다.
생각해보니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자본의 논리가 침범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영역’은 일상에서도 적지 않다.
구름 너머 피어오른 무지개나 차창 밖으로 스며든 노을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값을 치른다고
원하는 때에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은 혹등고래와 마주치는 일이 앞으로도 적당히 요원했으면 좋겠다는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많은 것을 예측하고 자본이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려 드는 세상에서,
가끔은 불확실하기에 더 가치 있는 영역이 있으니까.
혹등고래가 기대를 배신하고 유유히 사라진 이유는 어쩌면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내게 일깨워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조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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