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선비 이문건(1494~1567)은 ‘양아록’(養兒錄)을 남겼다.
말 그대로 “아이 기르는 기록”인데, 대상은 자식이 아니라 손주였다.
6남 1녀를 전염병 등으로 일찍 잃고 대가 끊길 위기에서 겨우 건진 손자였다.
첫니가 난 날과 첫걸음마의 감격, 아픈 손주를 위해 가슴 졸이며 처방했던 약제 등
16년의 내리사랑이 절절하다. 손주 보는 게 낙이라던 시절, 조선 유일의 ‘할아버지 육아 일기’다.
▶하지만 요즘의 조부모에겐 낙(樂)보다 고(苦)가 더 커 보인다.
60대 중반의 여자 선배는 일하는 딸 집에 매일 가서 손주를 돌본다. 주말에만 풀려난다.
아이는 예쁘지만 병날까 무섭다. 손목 터널 증후군부터 무릎 허리통증까지 이른바
‘손주병(病)’을 앓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0대 노모의 치매까지 시작됐다.
결국 그는 노모 집으로, 동갑내기 남편은 딸집으로 ‘출근’한다. 낀 세대의 비명이다.
▶조부모 세대가 ‘비자발적 돌봄’에 시달린다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실태 조사가 나왔다.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 절반 이상(53.3%)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녀의 직장 생활 등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돌봄을 맡고 있었다. 아이 봐주는 시간도 하루 평균 6시간을 넘는다.
단순한 ‘도와주기’ 수준을 넘어 직장인처럼 근무하는 수준이다.
응답자 46.8%는 “이제 돌봄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자녀 세대와의 육아 철학 차이는 또 다른 스트레스다.
먹이고 입히는 사소한 일까지 사사건건 간섭을 받다 보면 “고생하고 욕먹는다”는 서운함이 폭발한다.
갈등을 피하려 입을 닫다 보니, 현대의 황혼 육아는 기저귀 갈기, 밥 먹이기, 등하원 시키기 등
단순 육체노동에 매몰되기 일쑤다.
과거의 돌봄이 가문의 미래를 위한 ‘자발적 헌신’이었다면, 지금의 황혼 육아는 자녀 경제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자발적 대체 노동에 머물고 있다.
▶세계 각국은 조부모 돌봄에 경제적 보상을 서두르고 있다.
스웨덴은 부모의 유급 육아 휴직을 조부모가 양도받아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법을 고쳤고,
서울시도 자격요건을 갖춘 조부모에게 손주돌봄비 월 30만원을 지원한다.
집안 어른의 소일거리였던 육아를 사회적 가치를 지닌 노동으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500년 전 ‘양아록’이 절실하게 기록했던 본질은 수당이 아니라 손주와 함께하는 기쁨이었다.
지금의 조부모들에게 필요한 건 경제적 보상 못지 않게, 그들의 헌신을 당연시하지 않는
자녀의 감사와 온전한 ‘내 시간’ 한 조각일지 모르겠다.
출처 : 조선일보 만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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