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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딸의 권리와 의무 사이

by maverick8000 2026. 5. 8.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바다를 좋아하는 아빠 덕에 어릴 적부터 여름만 되면 낚싯대와 텐트를 싣고 바다로 떠났다.

며칠을 씻지도 못하고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혼절할 것 같았어도 무겁게 휘어지는 낚싯대를

하늘 높이 쳐들고 줄을 감아올릴 때의 짜릿함을 아빠에게 배웠다.

바닷바람 맞으며 랜턴 아래서 아빠와 컵라면을 호호 불어 먹으면 정말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해외여행으로 이야기가 잠시 빠지면서 동생과 나는 ‘아빠는 지루해서

해외여행은 싫어할 거야’라는 단정적인 말을 하고 말았는데, 아빠가 그랬다.

“아니야, 북유럽 크루즈 여행은 꼭 한번 가고 싶어”라고. 나는 좀 놀랐다.

아빠에게 그런 욕망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욕망의 어휘도 들어본 적 없었다.

순간 조금 놀랐다. 아빠 입에서 ‘북유럽’과 ‘크루즈’라는 단어가 나올 줄 몰랐다.

그런 욕망이 있다는 걸, 그런 상상을 해본다는 걸,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몰랐다.

무엇을 해보고 싶다는 말.



그래서였을까. 그 말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아빠 인생에 대한 슬픔, 그리고 이제 내게 ‘딸이라는 권리’보다는

‘딸로서의 의무’가 더 많이 남았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슬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누군가의 소망을 들어주고 싶어지는 순간, 내가 그 소망을 들어줘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이

함께 따라온다. 그 감정은 엄마를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부터 “엄마 이거 해줘”보다 “엄마 뭐 필요해?”라는 질문을 더 자주 던져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

부모가 약한 모습을 감추지 않고 기대고 싶은 마음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순간이 분명 있다.

평생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람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몸으로 깨닫는 순간,

그제야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것 아닐까.



박세미 시인

 


[출처]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