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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란타나, 뿌리의 시간

by maverick8000 2026. 6. 11.

 

 

 

나의 베란다 한편에는 10년째 계절을 함께한 란타나 화분이 있다.

란타나는 노란빛으로 피어나 주황을 지나 붉은빛으로 변해가는 마술을 부린다.

앙증맞은 꽃송이마다 자연이 빚어낸 색의 오묘함이 스며 있다.



하지만 그 란타나는 지난 5년 동안 단 한 송이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며 무기력 속에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나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다른 화분들은 계절에 맞게 꽃을 피웠지만, 유독 란타나만 몸살을 앓고 있었다.

꽃을 피우지 못한 란타나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은 긴 몸살을 앓고 있지만, 따뜻한 돌봄이 닿는다면 언젠가 꽃망울을 틔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 생각 끝에 다시 란타나 앞에 섰다. 굳은 흙을 고르고 물을 줬다.



가지치기를 하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자리를 살폈다. 부족한 햇볕이라도 조금 더 닿게 화분 방향도 바꿔줬다.

꽃을 돌보는 일은 곧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었다. 흙을 만지고 잎을 살피는 사이, 잃어버렸던

평온을 조금씩 되찾아갔다.

 

정성을 기울이자 어느 5월 아침, 5년간 침묵하던 란타나가 마침내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오래 기다린 끝에 다시 피어난 작은 꽃송이는 내게 삶의 위로가 됐다.

그 꽃은 단순한 개화가 아니라 긴 인내 끝에 찾아온 회복의 신호였고 내 마음에도 작은 불씨 하나를

다시 밝혀줬다.


그 꽃을 바라보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가족과 묵묵히 응원해준 분들을 떠올렸다.

야생화와 도심의 시멘트 틈에서 피어난 작은 꽃들의 생명력도 오래 마음에 새겼다.

홀로 견딘 줄 알았지만 가족의 사랑과 묵묵한 응원 그리고 자연의 힘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조금 더 안아주고 존중하는 법도 배워갔다.



그 무렵 나는 활짝 핀 꽃보다 꽃을 피우지 못한 뿌리와 줄기의 마음을 더 오래 헤아리게 됐다.

꽃이 피지 않는 시간은 결코 실패의 시간이 아니었다. 꽃이 피지 않았지만 뿌리는 자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그 시간 동안 더 깊고 단단하게 자라고 있었고, 생명은 침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작년 지리산 종주 끝에 천왕봉 정상에 섰을 때 문득 란타나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끝내 꽃망울을 터뜨렸듯, 나 또한 넘어지고 돌아오며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냈다.

삶이 늘 직선으로만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란타나는 말없이 내게 속삭였다.

삶은 조금 늦어져도 포기하지 않으면 다시 피어난다고.

희망은 먼 곳이 아니라 오늘도 어둠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마음 안에 있다고.

결국 꽃을 피우는 것은 봄이 아니라 꽃이 피지 않는 시간마저 견뎌낸 뿌리의 힘이라고.

 

고홍곤 야생화 사진작가

 

출처 :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