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목련 이야기

by maverick8000 2026. 6. 10.

 

 

 

늦은 저녁,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엄마는 시 짓기 숙제 때문에 잔뜩 골머리를 앓았다는 하소연을 조잘조잘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어색한 데가 없는지 봐 달라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재기발랄한 자작시 두 편을 연달아 읽어 내려가던 엄마가 이제 마지막이라며 잠시 숨을 골랐다.

짤막한 공백 끝에 이어진 한 줄. 

‘엄마는 시든 목련꽃 같아.’



봄의 초입에서 가장 먼저 하얀 불을 밝히는 목련. 당당하고 눈부시게 피어난 꽃이,

철을 지나 갈색으로 얼룩지며 툭툭 떨어지는 풍경이 눈앞을 스쳤다.

엄마의 눈에 비친 외할머니는 지금 그 계절의 끝자락에 서 계신 모양이었다.

고결하고 강인했던 한 여인의 봄이 있었다.

몸이 닳아가는 줄도 모르고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온 힘을 다해 삶을 피워낸 시절이.

그 여인의 봄 속에서 자라난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이 구절을 지었을까.

시든 목련꽃 같다는 비유 속에서 외할머니를 향한 애처로운 사랑이 목련 향처럼 배어 나왔다.



마음이 더 먹먹해진 건, 엄마에게서 또 다른 목련을 보았기 때문이다.

부쩍 작아진 체구가 자주 눈에 밟히던 참이었다. 영영 시들지 않을 것 같던 나의 엄마도,

당신의 엄마를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옅어져 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이토록 서글픈 글귀를 가슴에 새기지 않을까 하는

슬픈 예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먹먹했던 마음을 거두고 다시 엄마의 일상을 떠올렸다.

엄마는 세월의 무정함을 탓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당신의 봄날을 새로이 피워내고 있다.

엄마의 삶은 여전히 눈부셨다.

앞으로 앙상한 가지에 목련 꽃봉오리가 돋아날 무렵이면, 엄마의 시와 외할머니의 파리한 등을

동시에 떠올리겠지. 하얀 꽃잎 속에 겹겹이 숨어 있는 사랑을 봄이 다 가도록 음미할 것 같다.

슬픈 예감은 내려놓기로 했다.

내일은 엄마의 손을 꼭 쥐며, 당신이 지은 시가 정말 아름답다고 말해줄 것이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출처]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