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청천강까지 진격한 유엔군은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해 있는 사실을 몰랐다.
중공군이 평북 군우리에서 기습하자 미군 오른쪽을 지키던 국군 2군단이 궤멸됐다.
튀르키예 여단이 그 구멍을 막아야 했다.
중공군이 포위해 오자 베레모를 뒤로 던진 뒤 “모자가 떨어진 곳 이상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며
자리를 사수했다.
온몸으로 인해전술에 맞서는 동안 미군 주력은 전멸을 피해 한강 이남에서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한강을 건넌 중공군이 경기도 용인의 151고지를 점령했다. 고지를 되찾으려면 백병전이 불가피했다.
튀르키예 부대가 총에 대검을 꽂고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고지로 치달았다.
전통 칼까지 휘두르며 백병전을 벌였다. 중공군 수백 명이 사망했는데 튀르키예 전사자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유엔군이 ‘중공군 공포증’을 극복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튀르키예는 정예병만 연인원 2만여 명을 보냈다. 미국, 영국에 이어 셋째 규모다.
▶튀르키예 뿌리는 고구려 서북 초원에 있던 ‘돌궐’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와 돌궐은 우호 관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유목 민족의 전투력은 남달랐다.
튀르키예 국부 아타튀르크는 건국 전쟁 때 “공격이 아니라 죽기를 명령한다.
우리가 죽어가는 동안 동료가 우리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했다. “총탄이 없으면 대검이 있다”고도 했다.
6·25에서 튀르키예 부대가 보여준 불퇴전과 백병전에는 아타튀르크와 유목 민족의 상무 정신이 배어 있을 것이다.
▶6·25 당시 미군 포로의 3분의 1이 수용소 등에서 사망했다.
반면 튀르키예 포로는 244명 전원이 무사 귀환했다. 미군 등은 포로가 되면 지휘 체계가 무너졌지만
튀르키예 장병은 수용소 안에서도 계급과 군율을 지켰다.
식사량이 형편없는데도 동료가 아프면 건강한 사람이 자기 몫을 나눠줬다. 혹한에는 허약한 동료를
가운데 눕히고 껴안아 체온을 지켰다.
중공군의 세뇌 공작에도 아무도 넘어가지 않았다. 형제애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의 참전 용사가 본지 인터뷰에서 “(고아) 아이들을 1년 정도 돌봤다”고 했다.
튀르키예는 6·25 전쟁 고아를 보살피려고 부대 운영비를 쪼개 수원에 ‘앙카라 학원’이란 보육 시설을
운영했다. 640여 명의 전쟁 고아에게 새 삶을 줬다.
튀르키예처럼 한국을 위해 1000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면서 고아까지 돌봐준 전우는 거의 없다.
내일이 6·25 전쟁 76년이다. ‘형제의 나라’에 거듭 감사를 표한다.

출처 : 조선일보 만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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