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에 살지는 않지만, 대치동 은마상가 분식집을 찾은 적이 있다.
30년 업력 소문난 맛집이었는데 떡볶이·순대·튀김·어묵을 한 접시에 담아낸 정겨운 세트 메뉴가
절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게 만들었다.
건강 때문에 가게를 곧 접는다는 주인장은 “꼬마 때부터 오던 친구가 대학병원 의사가 됐다며
꼭 찾아오라더라. 내가 아이들을 대충 상대하진 않았구나 싶어 뿌듯했다”고 했다.
▶1979년 은마아파트와 함께 들어선 은마상가는 겉보기에는 낡고 투박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이자 강남 금싸라기 땅 한복판에, 시간이 멈춘 듯한 재래시장 스타일의 상가.
그런데 지하로 내려가면 독특한 생태계가 펼쳐진다.
2000평 규모에 수백 개 점포가 미로처럼 얽혀 떡집·반찬 가게·세탁소·수선집부터 산삼 가게와
흑염소집까지 공존한다. 방금 쪄낸 따뜻한 떡과 아침에 무친 제철 나물 향기가 진동하는 이곳은
입시 전쟁터에서 주민과 학생을 품어주는 거대한 안식처 같았다.
▶2년 전 그 분식집에 이어 이번엔 문방구가 문을 닫는다고 한다.
문방구 사장님이 가게 앞에 써 붙인 자필 편지를 읽었다.
“사랑하는 어린이 친구들,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비록 문은 닫지만 여러분의 멋진 앞날을 멀리서
응원할게요.” 그는 편지 말미에 민찬이, 서원이, 준서 등 단골 아이들 20여 명의 이름을 손글씨로
일일이 적었다. “오랜 시간 너희들이 많이 그리울 거야”라는 뭉클한 문장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요즘 초등학교는 자체 예산으로 준비물을 단체로 마련해 나눠주니 아이들이 문방구에 갈 일 자체가 드물다.
그나마 새로 생겨나는 곳들은 인건비를 아끼려 CCTV만 돌아가는 ‘무인 문방구’다.
바코드 찍는 기계음만 가득한 디지털 시대, 은마상가의 문방구는 아날로그식 낭만을 떠올리게 한다.
1등과 2등이라는 등수와 성적표만 존재하는 듯한 대치동 한복판에서, 그곳은 아이들의 성적 아닌
이름을 불러주는 다정한 숨구멍 아니었을까.
▶은마아파트는 오랫동안 강남의 ‘재건축 대어’로 불렸다.
머지않아 이 자리에는 더 높고 화려한 신축 아파트와 현대식 상가가 들어설 것이다.
아이들의 시험 성적 역시 이 동네 수많은 학원이 어떻게든 올려줄지 모른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한자리에서 아이들의 안부를 묻고 이름을 기억해 주던 ‘어른의 온기’도 재건축할 수 있을까.
옛 상가의 오래된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는 자리,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가로 정(情)이라는
추억을 지워나가는 중이다.
출처 : 조선일보 만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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