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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詩와 글과 사랑

더치페이 사회

by maverick8000 2022. 11. 16.

 

더치페이 사회다. 식당에서 계산할 때 줄지어 계산하는 일이 잦아졌다.

심지어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래도 괜찮을까.

어릴 때 식당이나 술집에 가면, 서로 돈을 내겠다고 다투는 사람들이 흔했다.

손해 보겠다고 나서는 게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친한 사이에서는 이게 정상이다.

만약 지난번에 내가 냈으니 이번엔 네가 내라고 조르는 등 만나면 손익을 다투는 쩨쩨한 사이라고 상상해 보라.

그 관계는 오래가기 어려울 것이다. 니컬라 라이하니 런던대학교 교수의 '협력의 유전자'(한빛비즈 펴냄)에 따르면,

인간관계는 서로 이익을 동등하게 주고받는 호혜 관계라기보다 상대의 보답을 기대하지 않아도

기꺼이 돕는 상호의존 관계이기 쉽다.

가족,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에게 세세한 계산서를 들이밀지 않는 것은 '우리는 서로 의존하는 사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과 같다.



상호의존 관계에서는 상대의 안녕에 내 이익도 걸려 있다. 따라서 돈을 내겠다고 나서는 일은

만날 때마다 둘 사이가 수지타산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괜찮은 공동 운명체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가 많은 사람은 늘 각자 계산하자고 나서는 각박한 인간보다 성공 확률이 훨씬 더 높다.



같이 먹고 각자 돈을 내는 거래 방식을 더치페이(Dutch pay)라고 한다.

더치트리트(Dutch treat·네덜란드식 대접)라는 말을 우리가 쓰기 쉽게 변형한 '한국식 영어'이다.

이 말은 본래 지인을 초대해서 한턱내는 네덜란드 관습을 가리킨다.

 

말의 사용법을 반대로 바꾼 것은 영국인들이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뛰어들면서 해상패권을 놓고

네덜란드와 여러 번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이 탓에 '네덜란드식 대접'은, 함께 식사한 후 자기가 먹은

음식값만 치르는 인색한 행위를 뜻하는 조롱과 경멸의 표현으로 변했다.



친구와 함께 식사하고 각자 돈을 내는 냉정한 거래는 인간 세상 어디에서나 비정상이다.

네덜란드에는 그런 관행이 있지도 않았다. 물론, 늘 계산에서 빠지는 무임승차자, 즉 배신자를 가려내서

처벌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라이하니에 따르면, 이 때문에 인류는 집단 이익에 협력지 않는 사람의 평판을 깎아내려 사회에서 추방하는 등

처벌 본능을 진화시켰다.



더치페이를 좋아하면 성공에서 멀어진다. 인간 사회에서는 늘 계산하겠다고 먼저 나서는 '바보'가 유리하다.

중요한 관계를 유지하고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연히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등

우리는 반복되지 않을 관계에서도 기꺼이 선행을 베푼다.

각자도생을 억제하고 좋은 평판을 장려하는 사회일수록 번영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