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미권의 고전학자들과 교류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출장 중이다.
빡빡하게 이어지는 일정이지만, 와 본 적 없는 곳에 처음 올 때면 바삐 걷는 와중에도 연신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게 된다.
옥스퍼드처럼 건물 하나하나에 수백년의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고풍스러운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눈은 끊임없이 그림이 될 만한 장면을 찾아내고 손은 신중하게 앵글에 담을 사물들을 선택한다.
사진은 선택과 배제에서 출발한다.
한정된 화면에 보이는 것을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배제하고
일부를 선택함으로써 오히려 실제보다 더 멋진 화면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필름 카메라와 달리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 일단 닥치는 대로 찍어 놓고 그중 잘 나온 것을 선정하는
것도 요령이다.
그런데 잔뜩 쌓인 사진 가운데 더 좋은 것을 고르고 결함을 수정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과 공력이
들어간다. 선택은 늘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한편으로는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번역도 그렇다.
좋은 번역을 얻기 위해서는 더 적절한 어휘, 더 근사한 표현을 얻으려면 엄청난 공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내용은 물론 맥락과 분위기까지 살리면서 유려한 문체로 번역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많은 선택의
과정이 수반된다.
망설임의 끝에 결국 택하지 않은 언어들은 번역자의 기억에만 남을 뿐이지만, 언어를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의 경험은 마치 여러 번 겹쳐 찍는 판화처럼 최종 작품의 밑에 겹겹이 깔려 있다.
번역 따위는 인공지능에 맡기면 되는 편리한 세상이다.
옥스퍼드에 가지 않아도 고풍스러운 풍경이 담긴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힘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주어지는 양질의 결과들 앞에서, 머뭇거리는 선택의 과정이 지니는
비효율적인 즐거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잊혀간다.
공자가 말한 최고의 기쁨은 ‘배우고 수시로 익혀 나가는 과정’에 있었다.
무엇이 최선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으며 선택하고 배제하는 과정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을까.
여전히 옛 책의 케케묵은 구절을 흥미롭게 들추며 열띤 논의를 멈출 줄 모르는 동서양의 고전학자들
속에서 떠올리는 엉뚱한 걱정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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