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가들은 만나면 예술 이야기를 하고, 예술가들은 만나면 돈 이야기를 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촌평에 공감한 적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가 돈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서울에서 기차로 세시간 가까이 걸리는 지역에 북토크를 하러 갔다.
행사 관계자가 차를 몰고 역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이십분 정도 이동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색함을 감추는 게 목적인 대화 흐름이 으레 그러하듯 소재가 둥둥 떠다녔다.
바깥 풍경에 대한 감흥, 한적한 도로 교통 상황, 그와 대비되는 서울의 만성적인 교통 체증,
서울의 높은 인구 밀도, 비현실적인 아파트 가격 같은 화제가 띄엄띄엄 이어지다 주식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그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물었다.
“지난달부터 주식을 시작했는데 잘 모르니까 그냥 삼성전자를 샀어요. 고점 아닌가 했는데
계속 오르더라고요. 더 많이 살 걸 그랬어요. 혹시 작가님도 주식 하시나요?”
“네. 삼성전자랑 에스케이(SK)하이닉스를 예전에 조금 사놨어요.”
“하이닉스도 사셨어요? 대단하세요. 선견지명이 있으시네요. 저도 그걸 샀어야 되는데.”
“아….”
속도가 느려진 차가 주차장에 진입하면서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에세이 워크숍을 소규모로 진행했다. 그날 글쓰기 주제는 ‘불안’이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어디에 가장 큰 불안을 느끼는지 회고했다.
참석자의 주 연령대가 삼십대여서 직업 관련 고민이 제일 많았다. 짝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포모(FOMO·뒤처질 것에 대한 불안)로 인한 괴로움을 토로했다.
남들은 다 환호하고 있는 이 시기에 본인은 매수한 주식이 떨어지고 있어 괴롭다고 했다.
무슨 주식이 제일 속상하냐고 물으니 엘지전자라고 했다. 내가 주식창을 열어 확인하고 난 뒤 고백했다.
“저도 후회하는 거 있어요. 현재 기준으로 비욘드미트가 마이너스 99프로네요.
스튜디오드래곤은 마이너스 70프로구요. 하. 마이너스 99프로는 정말 너무 심하지 않나요?”
그러자 듣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픈 주식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저는 카카오에 물려 있어요.”
“사실 저도…”
한바탕 시끌벅적한 슬픔이 지나갔다. 포모를 실토했던 사람이 아까보다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회사에서는 저만 못하는 사람 같았는데, 이상하게 여기에는 참 많으시네요.”
그의 흔들리는 눈을 내가 잠시 응시했다.
“여기에만 주식 못하는 사람이 유독 모여 있는 게 아닐 거예요. 아마 회사 안에도 떨어진 주식 갖고 있는
사람 많을 걸요? 차이가 있다면… 회사에서는 번 사람만 말할 뿐이죠.”
나는 평소에 누가 물어보면 능력 있어 보이려고 에스케이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있다고만 한다.
하지만 글쓰기 모임에서는 비욘드미트와 스튜디오드래곤을 언급한다. 글쓰기 모임의 속성이라는 게 그렇다.
실수와 실패, 고난을 다루는 게 글쓰기의 본령이니까. 에스엔에스를 파티장에 비유한다면 책은 입원실이다.
환자복을 입고 나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픈 곳을 말할 수 있다.
운 좋게 스마트폰이 없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는 시간이 있고 심심했던 덕분에 책을 읽는 게 습관이 되었다.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가서
책 속 사람들을 만났는데 주인공은 대개 커다란 결함이 있거나 사건과 불운을 겪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상황은 다를지라도 거기서 나와 닮은 마음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남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힘든 것 같다는 느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무언가가 되지 않으면 버려질 거라는 고질적인 공포,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혐오감….
악취를 풍겨서 꽁꽁 싸매고 있는 나의 마음을 표지 사진 속 단정해 보이는 저자 또한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도 놀라웠다.
현실에서 망한 자는 조용한데,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의 목소리만 주로 들려오는데, 종이 위에서는
반대로 망한 자들이 계속 말하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것 같아”라는 마음이 들 때마다 허겁지겁 책을 찾았고 그럴 때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하고
안도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보면 멀쩡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하고 이상하고 찌질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책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알았겠지만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내게는 하이닉스가 있지만 비욘드미트도 있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비욘드미트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른다.
그렇다면 아마 내가 보는 남들의 실제도 비슷할 거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덜 초조해진다.
말하지 않을 뿐이지, 당신에게도 비욘드미트가 분명 있을 테니까.
정문정 작가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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